이동용 (수필가/철학자)
인연은 사람의 일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인연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서로 낯을 가리기도 하고 어색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일과 상관없습니다.
인연은 시간의 문제이고, 시간 보내기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원하든 참고 견뎌야 합니다. 더 이상 참고 견딜 수 없으면 한계이고, 그 너머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것입니다. 거기서 깨달음이 주어집니다.
인연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입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말 그대로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존재이면서 존재가 아닌 존재입니다. 말이 안 되지만 말이 되는 이상한 말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실존의 형식을 꿰찹니다. 천국이 사실과 실존의 영역으로 인식됩니다. 실존이 천국이라 불릴 뿐입니다. 천국의 주인인 하나님은 실존의 주체가 됩니다. 이런 인식이 내세관을 형성해 줍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천국에서도 인간은 하나님 곁에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인문학적 문제’가 고개를 듭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순간, 전혀 다른 내용과 형식이 문제가 됩니다. 변화가 시작됩니다.
인문학은 신학을 전제합니다. 신학이 있었고, 인문학이 있었습니다. 중세가 있었고, 근대가 있었습니다. 암흑의 시대가 있었고, 르네상스가 있었습니다. 중세가 신학의 시대였다면, 근대는 인문학의 시대였습니다.
흐름을 알려면 앞과 뒤가 뚜렷하게 보여야 합니다. 신학은 정답 논리이고, 답이 있고, 그 답을 아느냐가 문제이며, 모르면 문제가 커집니다.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중세는 지성의 시대이고, 알아야 하는 것이 정해져 있던 시절입니다. “크레도 우트 인텔리감”, “나는 알기 위해 믿는다”, 이런 말이 중세적 발언입니다.
믿음은 지성에서 시작하고 동시에 지성 자체가 목표가 됩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구원의 조건입니다.
그런데 알아도 안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문제에서는 안다 해도 보장은 없습니다. 인생 그 자체는 안다고 해결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틀려도 됩니다. 틀렸던 경험이 성장을 거듭하게 합니다.
“인간은 노력하는 동안 방황한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신의 대사로 남겨놓은 유명한 명언입니다. ‘틀렸다, 그래서 방황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얘깁니다. 신학의 인문학화 내지 인간적인 신학의 탄생이라고 할까요.
시간이 흐르면 과거가 형성되고 미래가 보이듯이, 시대가 지나가면 옛것이 형성되고 새것이 보입니다.
새로운 것은 처음에는 조잡해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정교해지고 섬세해집니다. 때가 되면 그런 식으로 사회는 새로운 조직으로 재편되기 마련입니다. 한때는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과거와 미래를 갈라놓은 잔인한 시간을 일컫는 말입니다.
시간은 인정사정 봐 주지 않습니다. 지나가면 그만입니다. 그래서 인연과 사랑이 중요해집니다. 인연은 맺어져야 합니다. 관계는 형성되어야 합니다. 관계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은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의 형성도 시간 속에서만 실현됩니다.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각의 깊이와 크기도 달라집니다. 시간 보내기, 정말 신비로운 말입니다.
생각하면서 명상과 묵상을 반복해야 합니다. 명상은 잊음의 형식이고, 묵상은 기억의 형식입니다. 스님처럼 염불을 외우기도 하고, 두 눈을 감고 모든 것을 잊기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인연이 맺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인문학은 시간의 문제, 시간 보내기의 문제입니다.
지난주엔 옛 동기가 연락을 해왔습니다. 먼 곳에 사는 친구였습니다. 내 책을 사진 찍어 카톡으로 보내왔고, 나는 재밌게 읽으라고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시간도 맞아야 하고 인연도 맞아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아 아쉬울 따름입니다.












